화조도
수직으로 길게 자리한 화면은
크게 상단에 위치한 한 쌍의 나비,
화면 중심부에는 두 개의 꽃병과
꽃, 그리고 그 밑에 작은 그릇에
담긴 밥(?), 그리고 화면 하단에
산을 딛고 서 있는 두 마리 닭의 모습을
담고 있다. 새우처럼 묘사한
나비의 몸통이 재미있다. 나비는
조심스러운 비행을 하고 있다. 수묵의
맛으로 밀어올린 줄기의 표현이 좋고
흔들리는 잎사귀와 꽃의 처리가
제한된 색채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풍성하게 느껴진다. 온통 출렁이고
흔들리는 생명체들이다.
그것들이
마치
운율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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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하강하는 두 마리 나비의
자태는
흔들리는 꽃과 잎들 사이로
파고든다. 그것들 간의 경계는 없다.
상큼한
먹색이 싱그러운 생명체의
생성과정을
차분하게 들춰 보여주는
것도 같다.
꽃과 길상문으로 장식된
목이 긴 화병
입구에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먹으로
그린 댓잎 같은
잎사귀 표현이 기운차다.
이 병으로부터
만물이 소생하고
활기차게 밀어 올려
진다는 의미이리라.
하단에 그려진 풍경은
먹색의 차이로
겹, 층을 만들어 산의
깊이를 만들어 보인다.
그 위로
공중부양하고 있는 닭은 무엇엔가 놀란
듯한 모습이다. 우주자연이
활기차게
소생하고 활력이 넘치는
기운으로 혼곤한
어느 날의 자연계가
불현 듯 엄습하는
그림이다. 여러 공간, 다양한 대상,
이질적인
시간이 한 화면
안에 균등하게
배열되고 매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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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동일한 평면 안에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그림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화면 속의 대상의 크기도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대로 조절을 했다.
중요성에 따라 크게 그리고 작게 그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사물의 고정된 크기 개념이란
것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것을 크게 그리고
부차적인 것은 작게 그린다. 그렇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고 그림이다. 그림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사물의 크기와
위치는 가변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민화가 그 대표적 사례다.
(글. 박영택)